병자호란: 조선의 굴욕으로 이어진 두 달 간의 전쟁

후금의 성장과 명나라의 약화

17세기 초,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반면 명나라는 임진왜란의 여파로 약화되었다.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도왔으나, 내부에서는 농민반란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도덕적 실책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통해 후금의 침입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는 명나라를 지원하며 기회를 엿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강홍립 장군은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하는 전략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실책도 있었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낸 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그 예이다.


정묘호란과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인조가 왕위에 복귀했다. 서인들은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며 명나라를 지원하고 후금을 배척했다. 이때 ‘이괄의 난’이 발생했고,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무리들이 후금을 찾아 조선을 침공할 것을 부추겼다. 결국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고,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를 요구했다.


병자호란의 발발과 남한산성의 저항

1636년, 후금이 청나라로 변신하며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에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저항을 펼쳤다. 척화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했다.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에서 철벽 수비를 했으나 청군은 한양 근처까지 우회했다.


남한산성의 45일간 저항과 강화도 함락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저항했으나, 한양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온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혔다. 성 안에는 50일 분량의 식량과 1만 3천 명의 군사가 있었지만,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왕실 가족은 인질이 되었다. 결국, 조선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삼전도의 굴욕

조선의 인조는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로 갔다. 그는 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3배 9고두 행위를 했다.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나왔고, 그의 절하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 이후 조선은 청에 엄청난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한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이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효종의 북벌 운동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청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컸다. 조선의 백성들 역시 청에 공물을 바치느라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효종은 북벌 운동을 펼치며 청을 쳐서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효종이 병으로 죽으면서 북벌은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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