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마 안중근, 영웅의 생애와 순국의 길

🌟 출생과 가정 배경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兒名)은 응칠(應七)이었다. 이는 그의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을 담고 있다. 후일 자(字)로도 사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안인수였다. 안중근의 가정은 미곡상으로 번영해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며 무예에 소질을 보였다.


🏹 청년기의 모습과 전환점

청년기에는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명성을 날렸다. 동학운동 당시 그의 아버지 안태훈은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가담했다.

1895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며 서양 신학과 신식 학문에 눈을 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며 세례명을 ‘도마(Thomas, 多默)’로 받았다.


⚔️ 의병활동과 교육 사업

1904년, 안중근은 평양으로 건너가 석탄상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후 상점을 팔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이후 오학교(五學校)로 개칭했다. 남포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헌신했다.

1907년, 연해주로 이동하여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서 국내로 침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했다. 이후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으로 활동하며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 동의단지회와 결의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여 죽음으로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했다. 이들은 손가락을 끊어 결의를 다지며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결심했다.


🔫 하얼빈에서의 거사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가장해 하얼빈 역 플랫폼에 잠입했다.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며 조국의 독립 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러시아 경찰을 통해 일본 관헌에 인계되었다.


🙏 순국과 유산

뤼순형무소에 수감된 안중근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그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며 독립과 평화를 염원했다. 서예에 능했던 그는 옥중에서 많은 유묵을 남겼고, 이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70년에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안중근 연보

  •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 1895년: 가톨릭교에 입교.
  • 1904년: 평양에서 석탄상 운영.
  • 1906년: 삼흥학교 설립.
  • 1907년: 연해주에서 의병운동 참가.
  • 1909년: 동의단지회 결성,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910년 3월 26일: 뤼순형무소에서 사형 집행.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1970년: 서울 중구에 기념관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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