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으로, 1367년에 태어나 1422년에 생을 마감했다. 본명은 방원(芳遠)이며,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그의 묘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으로, 현재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이며, 비는 민제의 딸인 원경왕후다.
⚔️ 왕자의 난과 왕위 계승
이방원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첫 번째 왕자의 난(1398년)은 태조가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반발해 발생했다. 그는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고 방석과 방번을 죽였지만, 세자 자리는 동복형인 방과(정종)에게 양보했다.
두 번째 왕자의 난(1400년)에서는 넷째 형 방간이 박포와 공모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진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같은 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며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 정치적 숙청과 개혁
태종은 정치적 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태조 시절의 무장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거이를 사병 혁파 반대 이유로 제거했으며, 원경왕후의 민씨 집안은 세자와의 권력 다툼으로 몰락했다. 이후 그는 관제를 개편해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사간원을 신설했으며, 육조 중심 체제를 확립했다.
사병 혁파는 태종의 대표적 업적으로, 왕권 중심의 군사 체제를 정비해 국가 통치의 기반을 강화했다.
📜 분야별 주요 정책
억불숭유 정책
태종은 유학을 중심으로 국가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사찰을 폐쇄하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또한, 미신 타파를 목표로 비기와 도참 사상을 엄격히 금지했다.
호패법 실시
모든 국민이 호패를 소지하도록 해 인적 자원을 철저히 관리했다. 양반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되었으며, 이를 통해 적서 차별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국방 정책
여진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변방을 안정시켰다. 여진족을 회유하거나 진압해 국경을 강화했다.
문화 정책
주자소를 설립해 동활자인 계미자를 제작했고, 《동국사략》과 《고려사》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경제 정책
호포를 폐지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저화를 발행해 경제 유통을 촉진했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를 설치했지만 실효성은 크지 않았다.
의금부 설치
의금부는 고려 말의 순군제도를 개편한 국왕 직속의 법사 기관으로, 역모를 방지하기 위한 역할을 했다.
🕊️ 태종의 유산
태종 이방원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근본 체제를 마련한 군주다. 그의 강력한 개혁과 정책들은 조선의 안정과 발전을 이끌었지만, 정치적 숙청과 강압적인 정책들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조선의 근간을 세운 지도자로서 역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미국은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아래에서 연방 헌법을 기반으로 한 신생 정부를 출범시켰다. 워싱턴은 1797년까지 재임하며 강력한 국가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 1797-1801)는 강한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801-1809)은 민주주의 확립에 힘썼으며, 이후 4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809-1817)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린다.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817-1825)는 먼로 독트린으로 대외 정책에 획기적 방향을 제시했으며, 6대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825-1829)도 이를 이어받았다.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829-1837)은 7대 대통령으로, 강력한 리더십으로 서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 1837-1841), 윌리엄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1841), 존 타일러(John Tyler, 1841-1845)도 잭슨의 유산을 이어가며 미국 발전에 기여하였다.
11대~20대 대통령: 영토 확장과 내전의 시대
11대 제임스 포크(James Knox Polk, 1845-1849)는 영토 확장을 통해 미국의 서부 진출을 이끌었다. 12대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849-1850)는 내전 직전의 남북 갈등 속에서 나라를 통합하려 애썼다. 이어 13대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850-1853), 14대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1853-1857), 15대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857-1861)이 내전을 막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16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61-1865)은 남북전쟁을 이끌며 노예제 폐지와 국가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후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 1865-1869)은 재건 시대를 맞았으며,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1869-1877)는 내전 이후 미국의 재건과 경제 성장에 힘썼다. 19대 러더포드 헤이스(Rutherford Birchard Hayes, 1877-1881)와 20대 제임스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1881)도 국가 통합에 기여하였다.
21대~30대 대통령: 산업화와 개혁의 물결
21대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 1881-1885)와 22대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85-1889, 1893-1897)는 대규모 행정 개혁과 산업화에 집중하였다. 23대 벤저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1889-1893)은 공업화 시대의 초석을 다졌다. 25대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97-1901)는 스페인과 전쟁을 통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추구했다.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는 미국을 세계 강국으로 키웠으며, 27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909-1913)와 28대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913-1921)은 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29대 워런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1921-1923)과 30대 캘빈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Jr., 1923-1929)는 미국 경제를 성장시켰다.
31대~40대 대통령: 대공황에서 냉전까지
31대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1929-1933)는 대공황에 맞서려 했지만 경제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933-1945)는 뉴딜 정책을 통해 경제 회복에 성공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미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945-1953)은 냉전 시대를 개막하였으며,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953-1961)는 사회 기반 시설을 확장하고 냉전을 관리하였다.
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61-1963)는 젊은 리더로서 미사일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며,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63-1969)은 인권과 복지 정책에 주력하였다. 37대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69-1974)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제럴드 포드(Gerald Rudolph Ford, Jr., 1974-1977)와 지미 카터(Jimmy Carter, 1977-1981)는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81-1989)은 냉전 종식을 위한 경제 개혁과 외교 강화를 주도하였다.
41대~46대 대통령: 현대의 도전과 변화
41대 조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1989-1993)는 걸프전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을 확립했으며, 42대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1993-2001)은 경제 성장과 정보화 시대를 이끌었다. 43대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2001-2009)는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44대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II, 2009-2017)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으로서 건강보험 개혁과 경제 회복을 추구하였다. 45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2017-2021)는 보호무역과 이민 정책에 집중하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현재 46대 조 바이든(Joe Biden, 2021-)은 코로나19 대응과 환경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기여를 한 이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이 상은 1901년에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적 성취를 기념해왔다. 2024년, 한국의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문학이 세계적인 인정과 영예를 받게 되었다. 이는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노벨상 수상이며, 문학상으로는 첫 사례다.
노벨 문학상의 역사와 전통
노벨 문학상은 1901년부터 시작되어 2024년까지 총 12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세계대전 기간과 적절한 작품이 없다는 이유로 7차례 시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수상자는 스웨덴 한림원이 주관하며, 후보자와 선정 과정은 50년 동안 비공개로 유지된다. 이는 작가의 업적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발표하기 위한 조치다.
노벨 문학상 수상 과정
노벨 문학상 후보자는 전 세계 전문가와 단체로부터 추천받는다. 매년 1월부터 2월까지 추천이 접수되며, 4월에는 예비 후보자 15~20명이 선정된다. 이후 5월에 5명의 최종 후보가 결정되고, 10월에 스웨덴 한림원의 투표를 통해 수상자가 발표된다. 50년이 지난 후에야 후보자 명단과 선정 과정이 공개되며, 이는 투명성과 역사적 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절차이다.
2018년의 미투 파문과 수상자 선정 연기
노벨 문학상을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2017년 미투 논란에 휩싸였다. 한림원 종신위원 중 한 명인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의 남편 장 클로드 아르노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림원 내에서 심각한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2018년의 문학상 선정은 연기되었다. 2019년에 이르러 2018년과 2019년 두 해의 수상자가 함께 발표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국적 통계
노벨 문학상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국가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해왔다. 2024년 기준으로 프랑스가 16명으로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미국이 13명, 영국이 12명으로 뒤를 잇고 있다. 그 외에도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이 수상자 명단에 포함된다. 한국은 2024년 한강의 수상으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주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 (2010년 이후)
최근 수상자들은 문학의 다양한 장르와 주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10년 페루의 시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권력구조와 개인의 저항을 묘사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2016년에는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이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중문화와 문학의 경계를 허물었다. 2024년 한강의 수상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생명의 연약함을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한강,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다
한강의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글로벌한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녀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 무대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 생의 연약함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며, 문학을 통해 감정과 경험을 심도 있게 전달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동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이스라엘이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하마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큰 의문을 낳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왜 이처럼 무력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지난 수년간 이스라엘의 정치 상황과 군사적 대응력 저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권력 유지와 정치적 위기 대응 방식이 문제의 근원 중 하나로 꼽힌다.
권력 유지에 집중한 네타냐후
베냐민 네타냐후는 2019년 뇌물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외국 사업가로부터 3억 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권력 유지는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네타냐후는 자신의 개인적 위기를 국가적 위험으로까지 발전시키며 의회와 인사권을 활용해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2020년 면책특권 부여를 요청하며 연정 파트너였던 중도파 청백당의 베니 간츠 대표와의 약속을 저버렸다. 두 사람은 18개월씩 총리직을 번갈아 맡기로 했지만, 네타냐후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총선 재실시를 유도했다. 이러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이스라엘은 불안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극우 정당과의 연정과 도발
네타냐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反)이슬람 성향의 울트라 극우 정당 오츠마 예후디트와 연정을 맺었다. 그 결과, 이타마르 벤그비르와 같은 극단적인 인물에게 안보장관직을 맡기는 결정이 내려졌다. 벤그비르는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최소 8번 받은 인물이며, 그의 행동은 미국조차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벤그비르는 올해 초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성지 알아크사를 무턱대고 방문해 아랍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하마스는 이에 대해 보복을 천명했다. 그 결과,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공습이 발생하며 이스라엘의 안보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사법 무력화와 국민 반발
이스라엘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자신의 권력 비대화를 이유로 대법원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사법 무력화 법안을 지난 7월 관철시켰다. 이는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나섰다. 또한, 국방장관이 이에 반발하며 사표를 제출하는 등 이스라엘 내부의 혼란은 커져만 갔다.
심지어 모사드와 신베트와 같은 첩보기관에서도 네타냐후의 정책에 대한 반대 기류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안보에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이 틈을 타 하마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습을 감행했다.
전시 비상 내각과 극우 정당의 역할
전쟁이 발발하자 네타냐후는 전시 비상 내각을 구성했지만, 국민들의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극우 정당과의 연정을 유지하며 권력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전쟁 이후에도 네타냐후는 총리직 유지를 위해 극우 정당과의 연정이 여전히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네타냐후는 국민의 안전보다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우선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행보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책 마련에 집중했으며, 이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국가적 위기 속 네타냐후의 태도
네타냐후는 끊임없이 ‘다음 자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국민 대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에 집착하고 있다.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권력 유지를 위한 선택들을 반복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쟁을 통해 네타냐후의 태도와 그의 정치적 계산이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7세기 초,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반면 명나라는 임진왜란의 여파로 약화되었다.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도왔으나, 내부에서는 농민반란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도덕적 실책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통해 후금의 침입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는 명나라를 지원하며 기회를 엿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강홍립 장군은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하는 전략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실책도 있었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낸 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그 예이다.
정묘호란과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인조가 왕위에 복귀했다. 서인들은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며 명나라를 지원하고 후금을 배척했다. 이때 ‘이괄의 난’이 발생했고,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무리들이 후금을 찾아 조선을 침공할 것을 부추겼다. 결국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고,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를 요구했다.
병자호란의 발발과 남한산성의 저항
1636년, 후금이 청나라로 변신하며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에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저항을 펼쳤다. 척화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했다.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에서 철벽 수비를 했으나 청군은 한양 근처까지 우회했다.
남한산성의 45일간 저항과 강화도 함락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저항했으나, 한양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온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혔다. 성 안에는 50일 분량의 식량과 1만 3천 명의 군사가 있었지만,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왕실 가족은 인질이 되었다. 결국, 조선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삼전도의 굴욕
조선의 인조는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로 갔다. 그는 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3배 9고두 행위를 했다.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나왔고, 그의 절하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 이후 조선은 청에 엄청난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한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이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효종의 북벌 운동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청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컸다. 조선의 백성들 역시 청에 공물을 바치느라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효종은 북벌 운동을 펼치며 청을 쳐서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효종이 병으로 죽으면서 북벌은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 팔레스타인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중해 해안을 따라 길이 약 50km, 폭 5~8km에 이르는 좁은 땅이다. 총 면적은 약 362평방킬로미터로,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대이스라엘 저항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구성하는 요르단강 서안지역(웨스트뱅크)과 함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쪽 끝은 시나이반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가자시(Gaza City), 한유니스(Khan Yunis), 라파(Rafa)와 같은 주요 도시들이 위치해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팔레스타인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자지구의 역사
가자지구는 40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성서에 등장하는 삼손과도 관련이 깊다. 이 지역은 그리스, 로마, 아랍, 오스만투르크 등 다양한 세력에 의해 정복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가자지구는 제1차 중동전쟁(1948~49) 당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로서 주목받았고, 이후 194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휴전협정에 의해 이집트에 편입되었다. 수에즈 전쟁(1956) 때는 이스라엘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가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로 복귀되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가자지구는 다시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 놓였고, 이곳에 21개의 유대인 정착촌이 세워지며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불법 점거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가자지구의 자치화와 현대 갈등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잠정자치원칙 합의로 가자지구는 자치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94년 5월부터 팔레스타인의 자치가 시작되었고, 2005년 8월 15일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자국민을 철수시키며 자치의 길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잦은 충돌과 군사적 대립으로 인해 이 지역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들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하면, 미국 역사 전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부터 현재까지의 대통령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재임 기간과 소속 정당, 부통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1732-1799)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은 1789-1797년까지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부통령이 없었던 대통령이었으며, 그를 보좌한 인물은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였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1735-1826)
1797-180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한 존 애덤스는 미국의 초대 부통령이었으며, 연방당 소속이었다. 그의 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으로, 이후 그도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다.
민주공화당 시대: 토머스 제퍼슨과 그 후계자들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1801-1809년까지 재임하며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를 보좌한 부통령은 아론 버와 조지 클린턴이었다. 이어서 제임스 매디슨(1751-1836)과 제임스 먼로(1758-1831)도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각각 1809-1817년, 1817-1825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민주당과 휘그당의 갈등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1767-1845)은 1829-1837년까지 재임하며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 후 그의 부통령이었던 마틴 밴 뷰런(1782-1862)이 1837-1841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반면 휘그당 소속 대통령들도 등장했는데, 월리엄 해리슨(1773-1841)은 1841년에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그 해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인 존 타일러(1790-1862)가 휘그당에서 활동했다.
남북전쟁과 공화당의 부상: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은 1861-1865년까지 재임하며 공화당 소속으로 남북전쟁을 이끌었다. 링컨이 암살된 후 그의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1808-1875)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20세기 미국을 이끈 인물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1901-190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공화당을 대표했다.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는 민주당 소속으로 1933-1945년까지, 전무후무한 4선을 기록하며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를 이어 해리 트루먼(1884-1972)이 대통령직을 맡았다.
현대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까지
가장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1946-)가 2017-2021년까지 공화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그의 후임자인 조 바이든(1942-)이 2021년부터 민주당 소속으로 재임 중이다. 부통령으로는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자 유색 인종인 카멀라 해리스(1964-)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양한 정책과 변화를 이끌어 왔다. 이러한 역대 대통령들의 흐름을 파악하면, 미국의 역사와 정치 구조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